취향원정대 │2️⃣ 자막은 핑계고!
2025.10.26
러닝타임 이후에 남은 것들
취향원정대 모임은 단순히 “자막이 있는 회차에 초대하는 것”을 넘어,
공연을 본 뒤에 무엇을 나눌 수 있을까를 함께 알아보는 자리였습니다.
그동안 많은 청각장애인 관객에게 공연은
‘관람’이라는 행위 자체에만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을 것 같습니다.
볼 수 있는 회차가 한정적이거나, 아예 자막이 없어 시도조차 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
자막이 제공되는 회차를 미리 약속하고,
•
함께 공연을 관람한 뒤,
•
그 경험을 나눌 수 있는 작은 좌담 모임을 붙였습니다.
이 날은 두 개의 그룹으로 모임을 나누어 진행했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공연을 보고 나서도, 각 그룹에서 전혀 다른 이야기들이 쏟아졌습니다.
취향원정대 가이드
두 개의 공연, 두 개의 그룹
모임 1. <윌리엄과 윌리엄의 윌리엄들> 관극
친한 친구를 공연에 끌고 갈 때도 수많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이 친구가 이 공연을 좋아할까?’ ‘취향에 안 맞으면 어떡하지?’
‘공연 완성도가 기대에 못 미치면 어떡하지?’
한 명의 뮤덕으로서, 공연 관극 모임을 연다는 건 적지 않은 부담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내가 잘 모르는 참여자들을 초대하는 자리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 조합이 특히 신경 쓰였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그룹(윌리엄 관극 모임)은 신청자의 성향을 고려해 구성했습니다.
•
평소 공연을 자주 관람해온 사람
•
유니스텝 자막을 사용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
•
영화·드라마·애니메이션 등 콘텐츠 자체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
<윌리엄과 윌리엄의 윌리엄들>은 대학로 마니아층이 많이 찾는 작품이고,
마니아 팬이 많은 배우들이 출연합니다.
내용 자체는 어렵지 않지만,
취향 관점에서 보면 ‘중수 레벨’쯤 되는 작품이라
어느 정도 관극 경험이 있는 분들께 적절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모임 2. <불편한 편의점> 관극
두 번째 그룹은 서로 잘 아는 사이인 청각장애인·난청인 네 분이 한 팀이었습니다.
뮤지컬에 대한 경험이나 ‘덕력’이 높지는 않았지만,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한 번 함께 경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불편한 편의점>은 오픈런 공연이라
러닝타임, 공연장 위치, 전체적인 분위기 모두 입문자에게 적당한 공연입니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어 제목도 익숙하고,
원작에 기대어 나눌 수 있는 이야기 역시 많습니다.
참고로 이 공연에는 유니스텝 자막 서비스가 도입되어 있고
기획사에서 직접 기기를 관리하고 있는데,
외국인 관객이 정말 많이 찾아옵니다. (반년동안 200명도 넘게 왔음!!!)
이런 이유들로, 이번 취향원정대는
•
모임1. 윌리엄 그룹: 공연·콘텐츠 경험이 많은 관객
•
모임2. 불편한 편의점 그룹: 뮤지컬을 함께 “입문”해 보고 싶은 관객
이렇게 두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진행했습니다.
돌아보면, 아주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래 내용은 공연에 대한 스포일러가 조금 있습니다! )
공연에 대한 여러 개의 시선 – <윌리엄과 윌리엄의 윌리엄들>
<윌리엄과 윌리엄의 윌리엄들> 줄거리
산업 혁명이 시작된 18세기 말 런던
바쁘게 돌아가는 공장만큼 늘어나는 자본이 신분마저 바꿔주던 그때.
사람들의 이목을 단번에 주목시킨 사건이 발생한다.
셰익스피어의 유물이라면 무엇이라도 열광하던 런던 사회에
소네트 원본부터 유언장, 차용증서, 서신까지
셰익스피어 미공개 유물들을 쏟아내던 '아일랜드 부자'가
희곡 <보르티게른> 위작 논란으로 재판에 서게 된 것.
'셰익스피어의 작품이냐, 아니냐'를 두고 벌어지는 치열한 공방-
아들을 위해 열정적인 변론을 펼치는 윌리엄 사무엘 아일랜드.
진술 대신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윌리엄 헨리 아일랜드.
그리고 새로운 유물을 들고 나타난 미지의 신사 H.
1796년 4월.
모든 이들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마침내 재판정에 선 두 사람
이 재판의 결과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아버지와 아들을 둘러싼 감정들
<윌리엄과 윌리엄의 윌리엄들>은 셰익스피어 위작사건과 함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무대 위에는 거리감, 기대, 서운함 같은 감정들이 계속해서 오갑니다.
특히 많은 이야기가 모였던 장면은,
아버지 ‘사무엘’이 아들 ‘헨리’ 에게 건네는 “숨만 쉬어”, “가만히 있어” 같은 말들이었습니다.
대사만 보면 다소 무책임하거나 방임적인 태도로 읽히기도 합니다.
저와 대부분의 원정대원들도 같은 감정을 느꼈고요.
“꼭 방임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냥 거기 존재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끼지만,
그걸 제대로 말로 표현하지 못해서 저렇게 나오는 걸 수도 있겠구나 싶었어요.”
이 분은 자녀가 여럿 있으신 원정대원이었고,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며 사무엘의 대사가 좀 더 깊이 해석될 수 있는 해석을 열어주셨어요.
부자관계에서는 갈등 또는 관계의 모습이
일반적인 모녀관계처럼 역동적이거나 친밀한 양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저 역시 부모님과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사무엘과 헨리의 모습이 특별히 더 멀어보이지 않는 것 같아요.
유일한 남성 참여자였던 분의 이야기를 통해
성별과 상황에 따른 갈등의 모습도 가늠해볼 수 있었죠.
같은 자막, 같은 대사를 보고도
•
어떤 이에게는 상처가 되는 말로,
•
또 다른 이에게는 서툰 사랑의 표현으로
읽히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차이는 공연이라는 텍스트 자체보다,
관객의 나이, 가족 구성, 현재의 삶의 위치가 만들어낸 것에 가까웠습니다.
H의 정체는 ?
‘헨리’의 친구이자 멋진 신사, 사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H의 역할은
전체 이야기를 끌고 가는 중요한 캐릭터입니다.
행방이 묘연하고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 수 없기도 하죠.
H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 같아요.
주인공의 욕망과 상상을 투영하는 허상의 존재라고 생각했어요.
<팬레터>, <사의찬미> 같은 공연이 떠오르기도 했어요.
이 캐릭터에 매력을 느끼셨다면 이 공연들도 꼭 보세요!
그리고… 이 배우가 마음에 드셨다면 !$@@^)()#%(! 공연도 추천합니다! (수십개…)
정말 많은 수십개의 추천과 취향의 대화들이 오갔고
앞서 보여드린 가이드가 필요없을만큼 깊은 뮤덕 토크가 계속 되었습니다 :-)
이날 모임에서 인상적이었던 점은
공연의 “정답 해석”을 찾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받아들인 감정을 안전하게 말해 볼 수 있는 자리였다는 것입니다.
원정대원들은 공연을 워낙 많이 봐온 사람들이라,
여러 가지 접근성 장치를 경험해 본 경우도 많았습니다.
“ 접근성 장치가 있으면 웬만한 공연들은 다 보러 갔던 것 같아요.
전 대학로 공연들을 좋아하지만 그런 장치들이 제공되는 공연은
대부분 실험작품, 국공립, 지원작들이어서 취향엔 잘 맞지 않았어요.
그래도 볼 수 있는 공연이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어쩔 수 없이 봤어요. “
“웨어러블 기기를 제공하는 공연을 보러갔는데
안경 다리가 보청기를 눌러서 너무 아팠어요.
잠깐 자세를 고치다가 자막이 꺼졌는데 다시 돌아오지 않아서
남은 100분은 그냥 선글라스를 쓴 사람처럼 공연을 봤어요 (웃음)”
같은 공연에서 같은 경험을 한 분이 2명이나 있었어요.
그래서 웨어러블·개방형·폐쇄형 장치에 대한 선호도도
개인의 경험과 신뢰도에 따라 많이 갈렸습니다.
사실 이런 논의들은 몇 년 전부터 계속되었지만
사용자의 만족도에 따른 장치가 지속적으로, 안정적으로 제공되는 환경은
아직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반복되는 이야기들이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이 날의 대화에서 저에게 가장 큰 울림을 준
하나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긴 글을 마무리해보려고 합니다.
알을 깨고 나오는 헨리처럼
극 중 ‘헨리’는 사랑받기 위해, 관심을 받기 위해
어떤 모습과 행동들을 꾸며내기도 합니다.
많은 사건들을 통해 결국 ‘나다움’을 발견해나가는 헨리의 성장을 지켜볼 수 있었어요.
장애인이 되기 전과 후의 제 모습은 많이 달라요.
(후천적 청각장애인이 된 후에는) 무시를 당하기도 했고,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사회에서 소외되지 않으려고, 더 밝고 활발한 모습으로 나를 꾸며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극 중 헨리의 모습을 보며 ,
나다운 모습을 다시 찾아가는게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마치 <데미안>에서 ‘알을 깨고 나오는’ 이야기처럼 제 모습을 되돌아볼 수 있었던
충격적이고도 놀라운 순간이었습니다.
공연은 찰나의 순간이지만 내 평생의 모습을 되돌아보게도 하고,
새로운 삶을 향한 희망을 갖게하기도 합니다.
약 3시간 정도를 함께 했지만 원정대원의 마음에
어떤 동요가 일었다는 것이 기쁘고 벅차기도 한 순간이었습니다. (진짜 눈물 꽉 참았음)
@banbibooks『데미안』 / 헤르만 헤세 / 민음사
그리고 그 대화의 출발 지점에는,
모두가 같은 자막을 보고 같은 장면을 이해할 수 있었다는 조건이 놓여 있었습니다.
저 역시 공연을 오랫동안 봐왔지만,
친한 지인들 외에 공연에 대해 깊게 이야기해 본 경험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처음 만난 사람들과 이 정도의 밀도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겨우 자막 한 줄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와 관계들을 만들어내는지
또 유니스텝이 어떤 변화를 만들고 싶은지
이 글을 통해 조금이라도 전달된다면, 정말 기쁠 것 같아요.
<불편한 편의점> 공연을 모더레이팅했던
승아님의 이야기는 3편에서 이어서 소개할 예정입니다.
그 그룹에선 또 어떤 이야기들이 오고 갔을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