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연장을 바꾸는 한 줄의 자막
- 유니스텝, 1년의 기록 -
2025.08.08
지난 1년간, 공연장 자막 서비스 ‘유니스텝’을 운영하며
오롯플래닛은 지난 1년간 공연장과 무대 뒤를 꾸준히 오가며, 자막이 실현 가능한 시스템이 될 수 있을지를 실험해 왔습니다. 공연장 안에서 자막 서비스가 실제로 작동하는지를 하나하나 검증해 보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뮤지컬은 제가 오래 좋아해온 장르이지만, 그 안에서 자막이 우선순위에 오르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유튜브를 통해 뮤지컬 장면이 회자되고, 공연을 직접 관람하지 않은 사람들도 익숙하게 감상하는 흐름이 생겼습니다. 마니아 중심이었던 뮤지컬이, 이제는 더 넓은 관객에게 다가가는 콘텐츠가 되었다는 걸 느낍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자막은 선택이 아니라 기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 질문이, 유니스텝의 시작이었습니다
공연장엔 왜 자막이 없을까
시작은 단순했습니다.
“공연장에 자막이 없다면, 우리가 만들자.”
그래서 새로운 솔루션을 만들었습니다. 번역과 편집, 송출 시스템까지 포함한 자막 솔루션을요.
막상 서비스를 만든 뒤에는 예상치 못한 벽이 있었습니다.
정작 필요하다고 말해주는 공연장이 없었던 것입니다. 단순히 서비스를 잘 만들어 놓으면 누군가는 쓰게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서비스를 만드는 일과, 그 필요성을 설득하는 일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었습니다.
첫 공연도 없던 시절, 눈이 팽팽 돌던 앱 테스트
이 모양으로 5단 변신되는 파워거치대가 있다면 알려주세요
자막이 없던 이유는 기술의 부재가 아니라, 시스템의 부재였습니다.
누가 운영할지, 누가 비용을 감당할지, 어떤 방식으로 제공해야 할지. 관객도, 제작자도 필요성은 말하지만 실제 비용이나 운영 이야기 앞에선 대부분 망설였습니다. 그만큼 자막 없는 공연장에 너무 익숙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연 관계자들을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부정적인 반응도 많았지만, 꾸준히 이야기를 나누고 기회를 기다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감사한 조력자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인연들이 하나씩 기회로 이어졌고, 그 덕분에 유니스텝 자막을 실제 공연에 도입해볼 수 있었습니다.
경험은 의심보다 훨씬 더 큰 설득력을 가집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통신 장애, 장비 거치 문제, 이유를 알 수 없는 오류, 관객이 없어서 생기는 문제, 반대로 관객이 많아서 생기는 문제까지 다양한 상황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공연을 하나하나 치를 때마다 문제는 조금씩 해결되었고, 무엇보다 자막을 사용하는 관객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조심스럽지만 ‘해볼 만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작은 사례들을 쌓다 보니, 1년 만에 유니스텝이 적용된 공연은 어느덧 15편을 넘어섰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이 불안정한 시스템을 믿고 무대 위 자리를 흔쾌히 내어주신 공연사 대표님들과 공연 관계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너무 수상소감 같죠? 그래도 진심인걸요.
)
유니스텝의 아이디어를 처음 듣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자주 했습니다.
‘한국 관객들은 까다롭고 예민해서, 이기적이어서 이런 서비스를 받아들일 리가 없다.’
걱정과는 달리 이 서비스의 도입과 확장을 앞장 서서 지원해주는 관객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당장 나에게 필요한 서비스가 아니더라도, 내 옆자리의 관객을 위해, 언젠가 내 ‘덕친’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관심을 갖고 함께 고민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무언가를 정말 좋아해본 사람만이 베풀 수 있는 친절함과 기꺼움.
그 마음을 만날 때마다, 다음 무대를 준비할 힘이 생겼습니다.
(너무 많이) 남은 과제들
이번달에 새로운 버전의 앱이 나와요. 글씨체 예쁘지 않나요? :-)
공연장에 자막을 제공하기 위한 기술은 사실 오래전부터 존재해왔습니다.
실제로 이전에도 자막이 도입된 사례는 있었습니다. 대부분 단기간의 공공지원 형태였고, 공연 기간이 끝나면 함께 사라졌죠. 그러니 유니스텝이 처음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려는 일은 조금 달랐습니다.
기존의 방식에 머무르지 않고, 공연 현장에 맞춰 자막 시스템을 고도화하고, 일회성이 아닌 지속 가능한 구조로 정착시키는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자막이 '공연장의 일부'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아직 완성됐다고 말하기에는 갈 길이 멉니다.
누가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지, 어떤 기술 구조가 공연장마다 가장 적합한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질문이 많습니다. 기술적인 해결은 물론이고, 제도와 인식, 운영 방식까지 함께 고민해야 하니까요.
브로드웨이엔 이미 GalaPro 같은 자막 시스템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오픈런 중심의 공연 구조, 외국인 관광객 중심의 수익 모델, 그리고 정부와 지자체의 안정적인 지원까지. 공연 기간이 길고 자체 공연장을 보유한 제작사들이 자막에 대한 투자도 자연스럽게 감당하는 환경입니다.
반면, 한국의 공연 산업은 전혀 다른 구조 위에 서 있습니다.
3~4개월 단위의 리미티드런, 대부분 임대 형태의 공연장, 내수 중심의 시장.자막에 대한 논의는 이제 막 시작 단계입니다. 자막 송출 시스템 자체는 단순하고 동일합니다. 하지만 그 시스템을 어디에, 어떻게 도입하느냐는 전적으로 산업의 구조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배우는 기간이었습니다.
1년간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 공연 산업에 맞는, 한국형 자막 서비스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그게 유니스텝이 가야 할 방향이고, 우리가 계속 검증해가야 할 과제일 것 같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더 많은 공연과 더 많은 관객, 더 다양한 공연장을 만나야겠죠.
말은 그럴싸하지만, 지금까지의 자막 사례들과 비교했을 때 눈에 띄게 달라진 건 없어 보일지도 모릅니다. 기술의 형태도 비슷하고, 송출 방식도 그다지 화려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외부의 의심보다도, 스스로의 의심이 더 크게 다가올 때가 많았습니다.
‘더 좋은 기술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우리가 아니라 더 잘 아는 누군가가 했어야 했던 일은 아닐까?’
‘이걸 필요로 하는 사람은 정말 극소수인 건 아닐까?’
‘혹시 너무 이른 시도였던 건 아닐까?’
그런 생각들이 자꾸 따라붙었지만, 그럴 때마다 다시 마음을 붙잡게 만든 두 가지 순간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보여주고 싶은 건 선택지입니다
첫 번째는, 김초엽 작가님의 글입니다.
기술은 먼 미래가 아니라 현실과 가까운 곳에 줄곧 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선택지로 주어지지 않았다.
『사이보그가 되다』라는 책을 읽다 이런 문장을 만났습니다. 그 책에서는, 장애인의 삶을 실질적으로 바꿔주는 기술은 이미 나와 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장애를 극복’하거나 ‘완전히 사라지게 하는’ 거대한 기술을 기대한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화려한 기술보다 소리를 문자로 바꿔주는 간단한 기술이 자신들의 삶을 훨씬 풍요롭게 만들었다고요.
그 문장을 읽으며 생각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도달하지 못한 미래 기술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사용할 수 있는 기술로 오늘의 삶을 바꾸는 일이구나.
그래서 오늘의 자막이 내일의 문화를 만든다는 문장을 신념 삼아 서비스를 다듬어 나가고 있습니다.
둘째는, 공연장에서 만난 관객들입니다.
외국인 관객이 유니스텝을 사용하며 “한국에 여러 번 왔지만, 이렇게 내 언어로 공연을 본 건 처음”이라고 이야기했을 때, 언어가 다르다는 이유로 공연을 온전히 즐길 수 없었던 많은 사람들이 떠올랐습니다.
유니스텝은 청각장애인을 위해 만들었지만, 지금은 외국인 관객들이 더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서비스가 꼭 필요했다는 것을, 그들의 감상과 참여를 통해 매번 새롭게 실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관객들이 하나둘 늘어날수록, 언젠가 청각장애인 관객이 공연장을 찾았을 때 “여긴 자막이 있겠지”라고 믿고 방문할 수 있는 날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그 ‘당연한 환경’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늘 자막을 만드는 일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오늘의 자막이 내일의 문화를 만들 수 있을까요?
저와 친한 청각장애인 친구는 뮤지컬을 오랫동안 좋아해왔습니다.
대본을 미리 외우거나, 배우의 입모양을 읽으며 공연을 이해했고, 그래서 대극장 공연은 거의 볼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멀리 있는 배우의 입모양이 보이지 않으니까요. 유니스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도움을 준 그 친구가 처음 자막 서비스를 사용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사를 따라 가는 데에 집중하지 않고 공연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었어”
그 말을 들으며 생각했습니다.
단 한 사람에게라도 필요한 일이라면, 이 자막 서비스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걸.
짧게는 1년, 길게는 2년 가까이 준비한 이 서비스는 단 세 명의 팀으로 시작했지만, 수많은 협력자, 의사결정자, 그리고 관객들 덕분에 무대 위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묻고 있습니다.
자막은 공연장의 기본값이 될 수 있을까? 아직은 모든 질문에 답을 가진 건 아니지만, 하나씩 가능성을 확인해 가는 중입니다. 오늘도 무대 뒤에서 관객을 위한 한 줄의 자막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OROT PLANET
이 글을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아마 이 문화가 조금 더 많은 사람에게 닿기를 바라는 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롯의 이야기가, 유니스텝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닿을 수 있도록, 이 글을 공유해주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