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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하게 만드는 과정들 │ 최인혜



🧪 가능하게 만드는 과정들 │ 최인혜

가능하게 하다, ‘파’

‘가능하다’라는 뜻을 가진 수어를 좋아합니다.
손을 펴서 입 앞에 댔다가 내밀며 짧게 “파” 하고 내뱉는 동작.
농인이 발음 연습을 할 때 특히 어려운 소리 중 하나라서,
이 수어는 단순한 제스처가 아니라 ‘해낼 수 있다’는 의지가 담긴 표현이라고 배웠습니다.
제 이름을 발음대로 읽으면 [이네]입니다.
그래서 종종 ‘가능하게 하다’라는 뜻의 enable [이네이블] 을 닉네임으로 씁니다.
저에게 ‘가능’이라는 단어는 무적처럼 들리지만, ‘가능하게 하다’는 반드시 노력이 필요한 말입니다.
그 과정이 어렵기에 더 매력적이고, 저는 바로 그 과정을 즐기는 사람인 것 같아요.

첫 질문을 품게된 순간

중고등학교 내내 뮤지컬 영상과 음악으로 하루를 보내고,
방학이면 서울로 공연을 보러 다녔습니다.
이 좋은 걸 혼자 볼 수는 없어서 친구들을 공연장에 끌고 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한 기사를 읽게 됐습니다.
청각장애인 배우가 중심이 되는 뮤지컬 극단 Deaf West Broadway의 무대를 소개하는 글이었어요.
수어, 농인 배우, 보이스 액터가 한 배역을 함께 표현하는 장면은
제가 가지고 있던 장애예술에 대한 편견을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더뮤지컬
동시에 이런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청각장애인은 뮤지컬을 어떻게 볼 수 있지?”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내가 너무나 당연하게 누리던 공연이, 누군가에게는 선택지조차 없다는 것을.
그 사실은 제 안에서 오래, 깊게 파문을 남겼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공연도 장벽 없이 닿아야 한다.

이 다짐이 지금의 저를 여기까지 데려왔습니다.
2018년, 오롯 이라는 작은 동아리 활동이 창업으로 이어졌습니다.
목표는 단순합니다. ‘누구나 당연하게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
배리어프리 자막을 영화, 드라마, 영상에 적용했고, 이제는 오프라인 공연까지 확장하고 있습니다.
배리어프리가 필요한 곳은 여전히 많습니다.
손이 닿지 않는 영역이 훨씬 더 많고, 우리의 능력은 한정되어 있죠.
때로는 ‘이렇게 해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건 아닌가’ 싶은 순간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하나의 시도를 거치며 사람과 시스템이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을 봅니다.
완벽한 방법이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확신이 다음 걸음을 내딛게 합니다.

‘오롯’ 모자람 없이 온전하다.

ⓒ아뜨달 인터뷰
얼마 전 한 인터뷰에서,
누군가 ‘오롯’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해석하더군요.
온전함이라는 말은, 사실 결핍을 전제로 한 말 같다고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온전하게 만들고자 한다는 건
지금 어딘가가 비어 있고 부족하기 때문일 겁니다.
현실은 누구에게나 평등하지 않고,
시스템도, 인식도 여전히 부족합니다.
저 역시 오롯하지 않아서,
오롯해지기 위해 활동하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좋아하는 밴드 ‘9와 숫자들’의 앨범 <99%>에는 이런 문장이 있어요.
“99%는 100%가 결코 가질 수 없는 뜨거움과 환희를 품고 있다.
완벽에 가까움은 완벽보다 위대하고 의심의 여지없이 존재한다.”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완벽하게 모든 문제가 해결된 상태는 오지 않을 거예요.
온전한 배리어프리(Barrier-Free) 사회는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이 미완의 상태가 곧 우리의 현실이자, 지금 우리가 만들 수 있는 최선인 거겠지요.
그 안에서 답을 찾고, 가능하게 하려는 시도가 계속될 때,
우리는 언젠가 더 온전한 세상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질 거라고 믿어요.
온전할 수 없더라도, 온전함을 향해 가는 과정.
그 불완전한 여정 위에서, 저는 오늘도 오롯이 서 있습니다.